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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피아(Mafia)는 보호세 갈취, 범죄자 간의 분쟁 중재, 불법적 합의 및 불법 거래의 조직과 감독을 주요 사업으로 하는 시칠리아와 미국의 신디케이트 형 범죄조직이다. 상술한 활동 외에도 암금융(고리대금), 도박, 마약 밀매, 사기 등도 부차적 사업으로 삼는다.

2. 단어
'마피아'라는 단어는 원래 시칠리아의 비밀결사와 조직폭력배, 더 나아가 시칠리아 마피아가 개척한 미국의 범죄조직을 일컫는 단어였지만, 후에 영미권에서 '기업형 범죄조직'을 부르는 일반명사로 의미가 확장되었다.
2.1. 어원
마피아의 어원이자 첫 발상지는 이탈리아로, 그중에서도 주로 시칠리아 지역의 비밀 결사를 근원으로 하는 조직이며 이들이 미국에서 금주법을 타고 거대화되면서 지금도 좁은 의미로는 (라) 코사 노스트라 계열인 시칠리아의 범죄조직과 미국의 이탈리아계 범죄조직만을 마피아라 칭한다. 좀 더 넓게는 이탈리아계 범죄조직 전반을 마피아라 칭하기도 하고 더 넓게는 일반명사로 쓰여 국적 불문 범죄조직 그 자체를 칭하기도 한다.

기원이나 명칭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일단 근원지는 시칠리아가 거의 확실하다. 시칠리아는 여러 번 외세의 침략을 받아 외세에 대항하고 그 법과 질서를 따르지 않는 은둔 세력들이 매우 많았고, 이들이 정의로운 집단으로 취급되었다.
한편 상술했듯 시칠리아 마피아 외에도 나폴리를 거점으로 하는 카모라, 칼라브리아의 은드랑게타(Ndrangheta), 풀리아의 사크라 코로나 우니타(Sacra Corona Unita), 베네토의 말라 델 브란타(Mala del Brenta) 등을 마피아로 칭하는 경우가 많고, 일부 전문가들은 프랑스의 코르시카 제도를 거점으로 하는 조폭 유니온 코르스(Unione Corse)등도 마피아로 분류하기도 한다.

 



어원에 있어 가장 유명한 것은 1282년 시칠리아의 만종 사건을 둘러싼 시칠리아 기사들의 구호였던 "Morte Alla Francia Italia Anela!"(이탈리아는 열망한다. 프랑스인의 죽음을)의 이니셜을 취한 것이라고 하나, 이는 문법적으로 맞지 않는 말이라 후대의 창작, 즉 미드 등에서 효과적인 연출을 하기 위한 '작업'이라는 소리가 많다.
시칠리아의 만종사건은 13세기의 교황의 인가를 얻어 성왕 루이의 혈연인 샤를 앙주가 남부 이탈리와 함께 시칠리아를 무력으로 병합한다. 그리고 이 국가는 1282년까지 나폴리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존속하게 된다. 즉 프랑스 정권이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에 들어선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인 변동의 본질적 이유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보유하고 있는 폰 호엔슈타우펜 가문이 북쪽으로는 독일과, 남쪽으로는 이탈리아를 경계로 하여 교황령을 압박하고 있는 형세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슈타우펜 세력의 확장을 저지함과 동시에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이념을 가진 슈타우펜 가문의 사람보다 좀 더 교황령에 우호적인 사람에게 남부 이탈리아를 넘기고 싶었던 교황의 술책이 만든 걸작.

현재로서는 도적들에게서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부재 지주들이 만든 소규모 사병 조직 'mafie(채석장)'가 어원이라는 설, 'Mafioso(기세등등하다)'라는 단어에서 왔다는 설 등이 있다.

 



어원과는 별개로 원래 이탈리아인들에게 통용되던 'Mafia', 'Cosa Nostra'라는 말의 용법은 각각 한국어의 '건달', '조직'과 상당히 유사하다. 다만 코사 노스트라의 경우 조직 하나가 아닌 "연합체"이기 때문에 약간 괴리가 있다.
시칠리아 코사 노스트라의 2세대라고 할 수 있는 미국 마피아의 경우 '라 코사 노스트라(La Cosa Nostra, "This Thing of Ours", "우리들의 것")'라고 부른다. 비슷한 말장난으로 유대계 미국 조직폭력배들을 '코셔 노스트라(Kosher Nostra)'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코셔는 유대인들의 율법에 맞게 생산된 식품을 일컫는 말이다.
2.2. 일반명사로서의 마피아
위에서 설명한 대로 마피아(Mafia)라는 단어는 원조인 시칠리아-미국 범죄조직의 유명세로 인해 현재는 기업형 범죄조직을 지칭하는 일반명사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기에 이르렀는데 대표적인 예로 야쿠자는 Japanese Mafia, 삼합회는 Chinese Mafia라 부르는 식이다. 보다 정확한 명칭은 조직범죄/범죄조직(Organized Crime/Criminal Organization)이지만, 너무 딱딱하거나 길어서 그런지 '국적+마피아'로 퉁쳐서 부르는 편이다. 영미권에서 러시아군을 붉은 군대(Red Army)라고 부르듯이 러시아의 범죄조직을 편의상 레드 마피아 혹은 러시아계 마피아(Russian Mafia)라 부르는 것도 그 이유, 미국에서는 단순 갱스터라고 부르기에는 체계화, 기업화되었지만 이탈리아가 아닌 다른 혈통으로 이루어진 범죄조직을 아일랜드계 마피아(Irish Mob), 유대계 마피아(Jewish Mafia), 멕시코계 마피아(Mexican Mafia)라고 부르는 식이다.

즉, 아무런 수식 없이 단독으로 마피아라 함은 보통 이탈리아계 범죄조직을 칭하는 것이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도 마피아의 개념을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섬을 근거로 하는 강력한 범죄조직. 자국에서 정치적 폭력을 행사할 뿐만 아니라, 20세기 들어 미국 등의 대도시에서 마약과 도박, 금융 따위에 관련된 거대한 범죄조직을 형성하고 있다.'라고 정의했다.
3. 역사
3.1. 세계 대전 이전
이탈리아의 범죄조직들은 약 3000년 동안 이탈리아 역사 속의 수많은 정복 군대의 침략과 착취 기간을 지나며 진화했다. 지하 비밀 사회는 처음에 침략자들에 대한 저항 운동으로서 형성되었고 억압에 대항하는 자경단원들의 정의를 명확히 하기 위해 형성되었다. 이탈리아 전역에 고유한 범죄조직들이 각자 자리를 잡았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특기할만한 조직인 코사 노스트라 마피아가 형성된 시칠리아 섬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수 천년 침략의 역사를 거치면서 더욱 검소해졌고 안전, 보호, 정의, 생존을 위해 가족의 유대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토착 무력집단으로 출발한 이들 무리는 더욱더 폐쇄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고 나아가 19세기 중반을 경계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폭력을 휘두르는 범죄 집단으로 변하게 된다. 즉 현대적인 마피아의 최초 등장은 보통 1800년대로 보고 있다.

덧붙여 마피아들은 이탈리아인으로서 국교 가톨릭을 믿었으며, 이 과정에서 그들이 서로 종교적 혈연을 맺는 경우가 생겼고 거기에 더해 가톨릭 용어가 마피아 사회로 유입되는 경우가 생겼다. 예로 "영성체", "견진성사" 등이 있다. 후술할 이 단어들은 마리오 푸조의 소설 대부에서도 종종 사용되었다. 당장 대부에서 사람들이 비토 콜레오네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행위를 보자. 가톨릭 신자들이 교황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장면과 흡사하다.

당시 마피아 조직은 이탈리아 왕국이 국력을 확장하는 것과 궤를 같이 하여 정치, 경제, 사법에 걸쳐 세력을 확장했고, 결국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시점에서는 전국적인 조직으로 변모하게 된다. 이탈리아인들의 이민 붐을 틈타 마피아가 미국에 진출하게 된 것도 이 시기이다.

1920년대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탈리아를 통치하던 시절, 파시스트 정권은 시칠리아에서의 정부 세력을 강고히 하기 위해 1925년부터 검찰과 경찰, 군대까지 동원하여 철저한 마피아 탄압을 시작한다. 이에 마피아는 미국으로부터 자객과 무기까지 수입하며 저항했으나, 강대한 정부의 힘 앞에서는 무력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직전까지는 시칠리아 마피아 조직원 대부분이 수감되거나 정부의 단속을 피해서 더 지하로 파고들어가 숨어지냈고 나머지 조직원은 '친척'들이 사는 미국으로 달아나게 된다. 때문에 이를 전쟁 전 세대의 몰락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당시 파시스트 정권의 서슬이 얼마나 퍼랬던지 시칠리아의 범죄율은 1/10 이하로 떨어졌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시칠리아가 가장 살기 좋았던 시절이 무솔리니 통치 시절이었다고 회상할 정도다.
3.2. 미국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시칠리아와 다른 이탈리아 지역에서 미국과 캐나다, 호주 등으로 이주하거나 파시스트 정권을 피해 도주한 조직폭력배들이 그 나라에서 과거의 범죄 수법을 재현하기 시작했다.


그중 세계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미국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기존의 미국인들이 이탈리아계 이민자들을 박대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단체를 원했다. 어느 정도로 이탈리아 이민자의 차별이 심했냐하면 뉴올리언스의 시장 조지프 셰익스피어는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출신의 이탈리아 사람들을 가리켜 공공연히 "우리 중 가장 게으르고 사악하며 무가치한 인간들이며, 이 극악무도한 자들을 끝장내자, 설령 지구상의 모든 이탈리아인들을 모조리 쓸어버려야 할지라도."라고 얘기하기도 했다. 이런 환경은 이탈리아 사회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범죄적인 요소를 사용하게끔 하는데 기름을 붓는 셈이 되었다. 이에 수백 년 이탈리아 역사를 통해 이미 구축되어 있던 범죄조직 구조와 충성심을 적절하게 이용한 미국 마피아가 동포 사회를 보호하는 것으로 시작해 나중에는 그 사회를 착취해 나갔다. 또한 이탈리아계 이민자 공제회, 상업 조직 같은 단체들이 생겨났다. 이 단체들은 곧 마피아들의 힘의 원천이 된다.

초창기 미국 마피아의 대표적인 활동으로 '검은 손' 갈취가 있다. 이는 막 미국으로 이주하여 기반이 튼튼하지 않은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하고 원시적인 조직 범죄라 할 수 있는데 내용은 돈 많은 부자의 집에 검은 손바닥이 그려진 종이를 배달하고 그 밑에 '언제까지 얼마를 내지 않으면 목숨을 가져가겠다.' 라는 내용을 덧붙인다. 그리고 글자에 씌어진 대로 실제로 행했다.[11]

미국 마피아의 태동기인 1890년대부터 1928년에 이르기까지 약 30년에 걸쳐 뉴욕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주요 도시들에 마피아 패밀리들이 자리를 잡았다. 이 과정에서 시칠리아 출신의 마피아는 유대계나 아일랜드계 등의 다른 경쟁자들을 제압했다.[12] 이 과정을 거치면서 마피아는 확고한 암흑가에서의 입지를 다졌으며 때마침 닥쳐온 금주법으로 엄청난 부와 권력을 축적하게 되었다. 만약 이 시기에 금주법이 시행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마피아 세력은 한낱 삼류 불량배 수준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1930년에 이르러 50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미국 최대 규모의 마피아 항쟁인 '카스텔람마레 항쟁'이 벌어진다. 당시에 미국 마피아를 일종의 식민지로 삼고 싶었던 시칠리아 마피아 최고 두목 비토 카시오 페로가 자신의 부하인 살바토레 마란자노를 선봉장으로 세워 미국의 마피아를 규합하고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려고 하였으나, 뉴욕 마피아 최고 두목 주세페 마세리아가 이에 크게 반발하면서 두 파벌 사이에 항쟁이 시작됐다.

항쟁은 주세페 마세리아의 부두목인 찰스 루치아노가 마세리아를 배신할 것을 마란자노와 결탁하고, 유대계 갱단들을 포섭하여 마세리아를 제거하면서 끝났다.[13] 이후 살바토레 마란자노는 그동안 정체성이 모호한 채로 활동하던 미국 전역의 이탈리아계 범죄조직에 공식적으로 라 코사 노스트라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조직화하여 본인이 총 두목이 되었다. 루치아노는 마란자노로부터 마세리아의 조직을 물려받고 서열 2위가 되었다. 하지만 마란자노는 루치아노가 점점 더 실세가 되고, 루치아노가 시칠리아 마피아의 전통을 개의치 않는다는 것을 알고 제거하기로 결심했으나, 역으로 루치아노가 먼저 행동하여 마란자노가 자리에 오른지 4개월 만에 살해당한다.[14] 이 시기 마피아의 역사를 다룬 드라마로 보드워크 엠파이어가 있다.

찰스 루치아노는 유대계 조직이나 아일랜드계 조직들과 사이가 좋았다. 일단 루치아노의 최측근 마이어 랜스키부터 유대인이었다. 루치아노는 다민족 사회인 미국에서는 마란자노가 추구했던 이탈리아 순혈주의를 고집하는 조직은 오래가지 못 갈 거라고 보고, 혈통에 연연하지 않는 철저하게 기업화된 범죄조직을 원했다.

결국 찰스 루치아노가 주도권을 장악한 뒤 시칠리아 코사 노스트라 마피아로부터 사실상의 독립을 선언하게 된다. 이때 '두목 중의 두목'이라는 뜻을 가진 최고 두목의 칭호인 "Capo Di Tutti i Capi"를 아예 폐지하고 민주적인 위원회를 구성했다. 미국 라 코사 노스트라 마피아 패밀리는 인종이나 혈통에 상관없이 사업 관계를 맺거나 조직원으로 받아주게 되었다.[15] 가장 강력한 패밀리의 우두머리들로 구성되는 위원회에서는 사법적 기능을 수행했다.[16] 각 패밀리의 우두머리는 '보스' 또는 '돈'(Don)이라고 불렸으며, 그들의 권위에 대해서는 오직 위원회만이 문제 삼을 수 있었다. 나아가 다른 인종으로 구성된 유력 범죄조직들과 함께 전미 범죄신디케이트를 결성했다. 찰스 루치아노의 멘토인 아널드 로스스틴이 꿈꾸었던 민족적 분열을 넘어 협력하는 갱단의 새로운 조직구조는 루치아노와 랜스키에 의해 실현됐다. 이들이 만든 기본 구조와 위원회가 아직도 존재하며 오늘날 미국 마피아 상당수를 감독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창안자들이 얼마나 뛰어났으며 그 구상 자체가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증명한다.

항쟁이 종결되고 느슨한 연합 구조가 된 마피아 패밀리는 전국에 25개의 패밀리가 움직이게 되었다.[17] 찰스 루치아노의 지도력을 바탕으로 마피아는 미국에서 가장 강력하고 규모가 큰 범죄단으로 성장했으며, 범죄를 통해 획득한 이윤을 호텔·식당·유흥업 같은 합법적인 기업 소유에 재투자했다.

이때부터 이탈리아 본토로까지 세력을 역으로 확장, 부동산에 이르기까지 많은 자산을 독과점한다. 당시 본토 두목들은 이 하극상에 격분했으나 파시스트 정부의 탄압이 한창이던 시절이라 어쩌지도 못하고 발만 구를 뿐이었다. 이 '격차' 때문에 본토 마피아와 미국 마피아 사이는 한동안 어정쩡했다.

1933년 금주법이 폐지되면서 마피아는 밀주 제조•유통을 중단하고, 도박·파업조종·고리대금업·마약밀매·매춘 등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어찌 되었든 미국 내에 마피아들이 활개치는 상태라, FBI는 창설 초창기부터 범죄조직을 주적으로 삼게 된다. 다만 초기에는 제대로 잡지 못하고 삽질만 반복했다. 당장 FBI 국장 존 에드거 후버 마저 "마피아라는 범죄조직은 없다!"라고 헛소리를 하는 걸 넘어 많은 마피아들을 "완벽한 반공주의자에다가 진실로 애국적인 훌륭한 미국의 사업가."라고 묘사했다.  


1946년에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 정부와 협력한 대가로 교도소에서 석방되어 이탈리아로 추방된 찰스 루치아노는 본토 범죄조직의 재건을 도우며 본격적으로 양국 간 마피아 사업의 다리 역할을 맡았고, 국제 공조를 강화했다. 이로써 미국 마피아는 전국구 조직을 넘어 세계구 조직으로 발돋움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마피아는 쿠바에서 마피아 전국위원회를 개최하는 등 거점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라스베이거스 짓듯이 여러 카지노와 호텔을 지었다.[18] 그러나 독재자 풀헨시오 바티스타의 무능력과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쿠바 혁명 때문에 마피아는 자신들이 투자했던 금액의 원금도 못 받고 철수하고 말았다.[19] 덧붙여 카스트로를 지지했던 시민들은 주인 없는 카지노에 있던 슬롯머신을 깨부수는 세리머니를 선보였다.

1951년에는 미국 상원의회에서 키포버 청문회가 열려 전국의 마피아 인사들이 TV 카메라 앞에 섰다. 그중에는 찰스 루치아노의 후계자이자 당대 최고의 미국 마피아 두목이었던 프랭크 코스텔로도 있었다. 다만 이 시기까지만 해도 라 코사 노스트라의 실체가 일반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전이었고, 시민들은 청문회에 출석한 인물들을 '이탈리아 혈통의 거물 조직폭력배 두목' 정도로 생각했다.

1957년에 뉴욕 주 애팔러친에서 미국 전체의 마피아 두목들이 모인 "애팔러친 회합"이 열렸는데, 동네 여관이 모두 예약되고 다른 지방의 자동차들이 너무 많자 이상하게 여긴 한 순경에 의해 대외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당국은 필사적으로 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60년대 초반에는 참석자와 회의 내용에 대한 상세한 자료가 입수된다.[20] 이때를 기점으로 비로소 미국 마피아의 존재가 대중들에게 드러났으며, 존 에드거 후버는 어쩔 수 없이 "마피아는 없다... 가 아니라 있었네요."라고 말을 바꾼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떨떠름한 것은 여전했다.

1960년 8월, 미국 CIA 안보국장인 셰필드 에드워즈 대령은 마피아 암살자들에 의한 피델 카스트로의 암살을 제안했다. 1960년 8월부터 1961년 4월 사이에 CIA는 마피아의 도움을 받아 카스트로를 독살하거나 사살하려는 음모를 연달아 추구했다. 동시기에 마피아는 쿠바에 무력 공격을 감행해서 카스트로 정권을 축출해 카지노를 돌려주겠다는 존 F. 케네디의 대통령 당선을 돕게 된다. 하지만 피그스만 침공 작전은 실패했고 그밖에 여러 요인으로 케네디는 마피아와 척을 지게 된다.

1960년대부터는 미국 마피아가 시칠리아 마피아와 공조해 프랑스의 프렌치 커넥션을 바탕으로 유럽에서 헤로인을 밀수하여 많은 돈을 벌었다. 초창기 마약장사를 싫어했던 전통적인(Old-School) 마피아들은 점점 사라지고, 본격적으로 일부 두목들이 마약장사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 이것은 영화 대부, 프렌치 커넥션 등의 주요 소재가 되었다. 단, 프렌치 커넥션이 성행하던 시절에도 마피아 '정규 조직원'이 마약을 직접 거래하는 건 금기사항이었다.[21]

1963년에는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이 벌어지는데 이는 미국 마피아가 대통령 암살에 개입했다는 음모론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것만 집중적으로 다루려면 책 한 권이 나올 정도인데, 암살 사건 문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케네디 암살에 관한 공인된 '사실'은 리 하비 오스왈드가 케네디를 암살했고 그 오스왈드를 암살한 것은 잭 루비라는 댈러스에서 나이트클럽을 운영하던 마피아 준 조직원(하급 단원)이라는 것이다.[22] 두 사건 모두 당시 조사기관에 의해 우발적인 살인으로 결론이 지어졌다. 그 외에 암살의 배후세력이라든가 하는 것은 법원 판결 등 공인된 사실로 드러난 것은 하나도 없기에 추측의 영역이고 일종의 음모론이다. 그렇지만 21세기에 미국인 대상으로 진행된 케네디 암살의 배후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설문조사에서 마피아가 1위를 차지하고[23][24][25] 여러 정황증거가 암살의 배후로 마피아를 가리키고 있는 것 또한 아주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암살에 제일 적극적으로 가담했을 것으로 추측하는 인물은 3명의 두목인데, 시카고 두목 샘 잔카나와[26][27] 뉴올리언스 두목 카를로스 마셀로[28], 플로리다 주 두목 산토 트리피칸테 주니어[29]가 있다. 마피아가 암살에 가담한 게 맞다면 사안이 사안이니 만큼 뉴욕을 포함한 당대의 두목들이 위원회에서 다 같이 합의를 보았을 것이다.

1963년에 매클러런 상원 위원회에 출석한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 조셉 발라키가 "마피아는 존재합니다."라고 증언하며 미국인들에게 다시 한번 마피아의 존재를 각인시킨다.

20세기에 미국 마피아는 여러 차례 연방 정부와 협력했는데, 파시스트 정권이나 카스트로 정권에 대항할 때뿐만 아니고 흑인 척살을 목표로 하는 인종차별 집단인 KKK단을 수사하는 FBI를 돕기도 했다고 알려져 있다.[30]

상술하였듯, 금주법이 폐지된 이후 미국 마피아의 핵심사업은 밀주 유통에서 노조 장악과 도박 사업으로 옮겨갔다. 회사를 형성하는 세 다리 중 하나[31]인 노동자들이 "일 안 해!"라고 버티면 회사로서는 답이 없다. 마피아는 이 상황을 이용해 회사를 협박 및 갈취하는 수단으로 노조를 장악한 것. FBI에서는 노동조합을 가리켜 "LCN(라 코사 노스트라)이 얻는 금전적 이득, 국가적 권력, 영향력의 근본적인 원천."으로 설명한다. 마피아의 노조 역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이 1975년에 일어나는데,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미제 사건 중 하나인 지미 호파 실종사건이 그것이다.

그렇게 전성기를 누리던 미국 마피아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가 시작되었다.[32] 1960년대 중반에 FBI와 법무부, 재무부는 마피아를 공공의 적(Public Enemy)으로 규정하고 1970년에는 의회에서 마피아를 겨냥한 RICO법이 통과, 1972년에는 마피아와 사실상의 결탁관계에 있던 존 에드거 후버 FBI 국장이 사망하고 이후 FBI 측에서 본격적인 수사를 시작하여 1980~1990년대에 절정을 맞이한다. 특히 마피아는 1970년대 후반에 미국에서 소비되는 마약 제조와 밀수에 깊숙이 개입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생기는 막대한 이윤은 마피아 내부의 여러 계파 간에 강한 경쟁의 불씨가 되었으며, 그결과 살인이 빈발하자 정부에서 다시 마피아 지도자들을 재판·투옥하게 되었다. 그 밖에 조직원에 대한 감시와 도청, 이권 사업의 세무 사찰, 조직 내에 잠입수사원 투입 등을 통해 팔다리를 자르기 시작했고, 처벌도 강화되어 형량이 심하면 수십 년까지 올라가면서 타격을 많이 입게된다. 1980년대부터는 마피아 내부 규율을 무시한 채 오직 자기 이익에만 관심을 가진 조직원들이 꽤 생기면서 기강이 흔들리기 시작한다.[33]

1980년대에는 미국 법무부 서열 3위인 사법 차관 자리에 있다가 뉴욕 남부 검찰청으로 온 연방 검사 루돌프 줄리아니가 월 가의 거물급 재계 인사들에게 법의 심판을 내린 뒤 마피아 수사에 착수했는데, 1985년에 뉴욕 5대 패밀리의 두목과 부두목들을 겨냥해 일명 세기의 재판(Case of Cases)이라고 불린 마피아 위원회 재판(Mafia Commission Trial)이 진행된다. 1986년 말에는 위원회 구성원들이 줄리아니의 암살을 논의했다. 강경파인 콜롬보 패밀리 두목 카마인 페르시코와 줄리아니의 기소 명단에는 포함되지 않은 신임 감비노 패밀리 두목 존 고티는 암살을 찬성했지만 나머지 구성원들의 반대로 이뤄지지 않았다.[34] 결국 위원회 재판은 연방 정부가 승소하고 피고인들은 깔끔하게 유죄판결을 받는다.[35]

일부 조직원들은 수십 년간 수감생활을 해야 한다는 데는 도리가 없었던 듯 재판에서 정부 측 증인이 되어 협조했고, FBI의 끈질긴 수사로 인해 1990년대에는 과거 미국 정부보다 강한 집단으로 군림했던 마피아 패밀리들 대부분이 전과 같지 않았다. 1993년에는 변절한 감비노 패밀리 부두목 새미 그라바노가 미국 상원의회에 출석해 국회의원들에게 미국 내 조직범죄에 대한 증언을 하기도 했다.[36]

기존에는 마피아 생활에 회의를 느껴 조직을 탈퇴하면 오메르타(Omertà), 즉 침묵의 계율을 어겼다는 배신자의 낙인과 함께 돌아오는 죽음뿐이었지만, 이제는 FBI 및 연방검사와 협조해서 낮은 형량 혹은 불기소처분을 보장받고 법정에서 Pentito라 불리는 증언자가 되어 증언을 하면, 증인보호법으로 새로운 삶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현상을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보통 이탈리아인 조직원 보다 자본주의에 물든 미국인 조직원들이 오메르타를 더 잘 어긴다는 시각이 있다.

불법사업 및 조직범죄법과 FBI의 도청 등이 활발하게 사용되면서, 마피아들은 입 한 번 잘못 놀리면 조직 수뇌부도 타격을 입는 상황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는 뉴욕 제노비스 패밀리의 경우 말단 조직원이 누구의 지시를 받는지, 같이 일하는 동료의 이름이 무엇인지조차도 모르게 하는 방향으로 발전했고 이러한 경향은 미국의 다른 마피아 패밀리들도 마찬가지다. 물론 FBI 요원들도 최대한 범죄 혐의를 입증하려 수사에 달라붙는다. 현대 마피아들은 도청기가 수사에 도입된 이래 여러 차례 당해온 과거의 경험으로 전자기기를 찾아내는 전문가를 초빙하는 등 금속탐지기를 이용해 수시로 아지트에 도청기 설치 유무를 검사하는 건 기본 덕목이 되었다.
3.3. 세계 대전 이후 시칠리아
다시 시칠리아로 돌아가서,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재직기간 동안 '철의 장관' 체사르 모리를 시칠리아 주지사로 임명해 마피아를 강하게 탄압했다. 모리는 수천 명의 마피아를 체포하고 고문해 이들의 세력을 약화시켰지만 시칠리아 코사 노스트라 마피아를 원천적으로 근절시키지는 못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파시스트 정권이 무너지고 무솔리니가 총살되어 측근들과 함께 피아잘레 로레토 광장에 전시되었을 때, 숨죽이고 있던 시칠리아 코사 노스트라 마피아는 때맞춰 교도소에서 석방되어 이탈리아로 추방된 전설의 찰스 루치아노를 위시로 한 미국 세력의 지원에 힘입어 부활한다. 이내 이탈리아 본토까지 장악하여 과거의 세력권을 회복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사례를 들자면 전후 이탈리아 정치를 가장 좌지우지한 대 정치가이자 7차례에 걸쳐 총리를 지낸 줄리오 안드레오티는 충격적이게도 정치 은퇴 이후 시칠리아 마피아의 일원으로 인정받아 유죄판결을 받는다.[37]

1962년, 마피아의 폭탄 테러로 국가 헌병대원(Carabinieri) 7명이 죽는 참사를 계기로 1차 마피아 항쟁(Prima Guerra di Mafia)이 시작되었으나 잔챙이들만 잡았을 뿐 큰 성공은 거두지 못했고, 1970년대 말부터 헤로인 무역의 지배권을 두고 발생한 조직 간의 내부 항쟁으로 시작된 2차 마피아 항쟁(Seconda Guerra di Mafia)이 발발, 이것이 1980년대를 관통하는 마피아 대전(The Great Mafia War)으로 번져 항쟁으로만 연간 200여 명이 죽어 나가는 참사를 빚었다. 심지어 1982년에는 치안 확보를 위해 출동한 국가 헌병대의 지휘관 키에르자 장군조차 암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시기 이탈리아에 파견 지원을 간 한 FBI 수사관은 "미국 마피아 간 항쟁에서는 볼 수 없었던 참극을 시칠리아에서는 볼 수 있었다."라고 밝힐 정도였다.

아무리 태평한 이탈리아인들도 이것만은 참지 못했다. 결국 의회가 나서서 '반마피아 법'을 제정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힘을 얻은 사법당국도 용기 있는 젊은 검사들을 주축으로 대규모 검거 작전을 시행한다. 이 과정에서 피비린내 나는 내부 투쟁을 겪으며 마피아에 환멸을 느낀 시칠리아 마피아 간부 토마소 부셰타가 간부급 중에는 최초로 오메르타를 어기고 정부 증인으로 나선다. 1984년부터 1987년까지 이어진 대재판(Maxiprocesso)은 조직으로서의 마피아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 당시 마피아와의 전면전에 나섰던 검사들은 암살 위협을 피하기 위해 경호가 용이한 교도소에서 생활하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제소자들과 같이 산 것은 아니고, 격리 구역에서 지냈다.

1992년, 마피아 검거의 선봉에 섰던 조반니 팔코네(Giovanni Falcone) 판사 부부와 3명의 경찰관이 자동차 폭탄으로 암살되었다.[38] 이는 건슬링거 걸의 모티프가 되었으며, 범인을 검거하기 위해 미국 FBI의 지원으로 DNA 분석을 하여 법정 증거로 제출되기도 하였다. 2019년에는 팔코네 판사 암살에 미국 마피아 조직인 감비노 패밀리가 관여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39]

조반니 팔코네 판사가 암살당한 후, 뒤이어 동료 파올로 보르셀리노(Paolo Borsellino) 판사까지 살해된다. 시칠리아 마피아 수뇌부는 음지에서의 압도적인 무력으로 국가와 시민들을 통제하려 했지만 이 만행은 그들의 터전이던 시칠리아 시민들까지도 격분하게 만들었다. 두 판사는 국민적 영웅이 되었고, 시민 차원의 제보와 하부 조직원의 자수가 잇따랐다. 결국 살바토레 리나가 포함된 다수의 최고위급 두목들이 검거, 투옥되었고, 지금도 꾸준히 '반마피아 운동'이 계속되고 있다. 이들 두 명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현재 시칠리아 팔레르모의 공항 이름은 팔코네-보르셀리노 공항으로 되어 있다.

1993년, 고향인 시칠리아 브란카치오(Branccacio)에서 반 마피아 운동을 하던 주세페 풀리지(Giuseppe Pino Puglisi) 신부가 56번째 생일이던 9월 15일에 마피아에게 총을 맞아 순교하는 일이 벌어졌다. 풀리지 신부는 뭍에 있는 교구를 돌아다니다 1990년에 고향 교구로 돌아온 이후로 지속적으로 마피아에 대항할 것을 설교하고, 아이들이 탈선하여 마피아에 가입하는 일을 막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하던 중 자기 성당 앞에서 괴한들의 총격을 받아 사망하였다.[40] 풀리지 신부가 사망한 사건은 다시 한 번 이탈리아에 충격을 주었다. 2013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풀리지 신부의 고향 교구인 팔레르모 대교구의 전임 교구장 주교였던 살바테로 데 조르지 추기경을 대리인으로 삼아 시복식을 허가하였으며, 삼종기도 시간에 풀리지 신부를 언급하며 마피아의 악행을 규탄하였다.

시칠리아 마피아의 지나친 살육전으로 인해 대부분의 지도부들이 종신형을 선고받아 수감되거나 궐석재판에서 종신형이 선고되어 지명 수배자 신세가 된다. 수감된 두목급 인사들은 자신의 대리인을 대행 두목으로 내세워 복역 중에도 조직을 이끌었고 지명 수배자가 된 두목급 인물들은 정부의 수사망을 피하면서 조직을 이끌었다. 하지만 과거처럼 안정된 상태에서 조직을 운영하는 것과 비교하면 영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시칠리아 코사 노스트라 마피아는 전 세계로 뻗친 범죄 제국으로서 그 위상을 지키고 있다. 얼마 전에도 군대까지 동원하여 거의 내전을 방불케하는 대규모 체포 작전이 시칠리아에서 벌어졌다. 하지만 1980~1990년대 비슷한 시기에 진행된 이탈리아-미국 양국 정부의 대대적인 수사와 재판으로 시칠리아의 코사 노스트라 세력과 미국의 라 코사 노스트라 세력은 과거에 비해서 많이 약화됐다. 다만 여기서 이탈리아는 새로운 문제를 마주하게 된다.
3.4. 본토 범죄조직 세력의 대두
1992년 '깨끗한 손'이라는 기치 아래 시작된 반부패 운동과 정부의 반 마피아 단속 조치는 시칠리아 코사 노스트라 마피아만큼 유구한 역사를 지닌 이탈리아 전역의 다른 범죄조직들도 대상으로 했지만, 이들 본토 세력들은 수사망이 집중된 시칠리아 마피아에 비하면 훨씬 작은 타격을 받았다.[41] 대표적인 본토 범죄조직들로, 1800년대 중반 나폴리의 교도소에서 시작된 '카모라'와 1860년대에 이탈리아 정부에 의해 시칠리아인 집단이 칼라브리아 지방으로 추방되면서 형성된 '은드랑게타'가 있다. 이들이 시칠리아 마피아의 세력권에 침투했고 이탈리아의 새로운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2010년 칼라브리아 지방의 은드랑게타는 정부 상대로 선전포고도 했다. 이탈리아 정부는 대전차 화기를 동원해 고속도로 확장공사를 방해하려는 은드랑게타 조직원들에 대항하기 위해서 군 병력을 투입하기도 했다.

FBI에 의하면 현재 이탈리아에서 가장 거대한 범죄조직은 나폴리의 카모라고, 2번째가 시칠리아 코사 노스트라 마피아라고 한다.#

본토 세력들은 해외 범죄조직들과 연계하면서 초국가적인 조직이 되었다. 미국 FBI에서는 시칠리아 마피아(코사 노스트라)와 미국 마피아(라 코사 노스트라) 간의 전통적인 국제 공조에는 '오래된 다리(Old Bridge)'라는 이름을 붙였고, 칼라브리아의 은드랑게타와 미국 마피아(라 코사 노스트라) 간의 신흥 국제 공조에는 '새로운 다리(New Bridge)'라는 이름을 붙였다.
2000년대 배경의 미국 드라마 소프라노스를 보면, 미국 뉴저지 주의 마피아 부두목인 주인공이 국제 범죄 공조를 위해 이탈리아를 방문하는데, 시칠리아 마피아가 아닌 나폴리의 카모라를 찾아간다. 이것은 (비록 픽션이긴 하지만) 21세기 들어 이탈리아 본토의 범죄조직들과 교류가 많아진 현대 미국 마피아를 나타낸 것으로, 나름의 현실 고증인 셈이다.

본토 범죄조직들은 여전히 주요 사업영역을 장악하고 있지만, 자신들의 구역을 동유럽 알바니아계 범죄조직 같은 외국 세력들에게 기꺼이 빌려주고 있는데 이것은 후환거리를 만드는 짓일지 모른다는 추측도 있다. 미래에는 이탈리아 세력이 아닌 외국계 도전자 세력들이 이탈리아의 조직범죄를 책임지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
3.5. 현재의 이탈리아 범죄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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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이탈리아에 존재하는 모든 범죄조직의 총수익 예상치는 한화 약 240조 원에 달한다. 거기다 장기간의 경제 불황으로 18만 명의 자영업자들이 추가로 이들이 운영하는 고리대금을 빌릴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으며, 마찬가지로 경제 불황으로 인한 마약류의 수요 증가, 불법 외국 이민자의 유입(당연히 브로커는 범죄조직) 등으로 이들의 자금력은 앞으로도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탈리아의 경제 위기가 심화되면서, 범죄조직들이 풍부한 자금력을 기반으로 합법 사업에 진출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이탈리아의 모든 범죄조직이 자금 세탁을 통해 확보한 자금은 약 220조 원인데, 어디까지나 추산 가능한 수준이며, 지하에 감춘 검은 돈까지 포함하면 훨씬 더 불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건설, 소매업, 운송과 숙박 등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는 사업을 노린다고 한다.
3.6. 현재의 미국 마피아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서,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미국의 조직범죄에서 라 코사 노스트라 마피아의 역할이 줄어들고 있다는 여러 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여기에는 1980년대부터 여러 마피아 활동의 기반을 와해시킨 FBI의 성공적인 단속과 더불어 또 다른 요인으로, 고립되어 있던 이탈리아-시칠리아계 사회가 차츰 해체되고 이들이 전체 미국 사회로 흡수됨에 따라 마피아 단원을 기르기 위한 전통적 양육의 기초가 실제적으로 줄어든다는 데 있다. 그래서 현대 미국 마피아는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이 시칠리아의 팔레르모나 코를레오네, 트리파니 등지에서 신규 조직원을 차출해 온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상술한 일련의 사건들을 거친 후에도 불구하고, 2006년에 인류학자 데이비드 사우스웰(David Southwell)이 발간한 조폭연대기(원제: The History of Organized Crime)의 본문을 보면 언론에서는 관심을 끌기 위해 미국 범죄의 지배세력인 라 코사 노스트라 마피아를 대신할 새로운 조직이 나타났다는 소재를 즐겨 쓰지만 대부분 지나친 억지 추측이나 거짓으로 판명 난다.라고 적어 놓았다. 사우스웰에 따르면 마피아를 제외할 경우 미국 암흑가의 지배적인 세력은 바이커 갱단이라고 한다. 또 FBI 홈페이지에서도 여전히 라 코사 노스트라 마피아를 가리켜 '미국 사회를 위협하는 가장 중요한 조직범죄(one of the foremost organized criminal threats to American society)'로 설명하고 있다.

2002년 FBI는 미국 라 코사 노스트라 마피아가 한 해 동안 벌어들이는 돈을 500억 달러~900억 달러(약 55조 원~100조 원) 사이로 추산했다.#

FBI 보고서에 따르면 미 북동부•중서부•남부 지방과 캘리포니아 주의 주요 도시들에 총 3000명이 넘는 라 코사 노스트라 마피아 정규 조직원들과 준 구성원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해외 조직들과 공조해 초국가적인 범죄활동을 펼친다고 한다.#

2011년 월스트리트 저널에서 왜 21세기에도 여전히 이탈리아계 범죄조직이 세계의 중심이자 다민족 국가인 미국의 암흑가에서 가장 강력한 집단으로 남아있으며, 왜 미국 내 다른 범죄조직들은 라 코사 노스트라 마피아가 누리고 있는 광범위한 영향력에 근접하지 못하는가에 대한 특집 기사를 썼다. 전문가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라 코사 노스트라 마피아의 유구한 역사와 강력한 조직구조, 원활한 조직원 수급 능력도 한몫하지만 이들의 도전자라고 할 수 있는 러시아계 레드 마피아 세력의 경우 특정한 범죄 공모를 위해 잠시 뭉친 후 해체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점이 수사망을 피하는 데는 유리할지 모르나 이들을 많은 조직원의 수를 갖춘 체계적인 집단으로는 성장하지 못하게 했다. 한편 대부분의 아시아계 갱단들은 그들 자신의 이민자 집단 구성원들만을 희생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1980년대 후반 뉴욕 시 차이나타운을 거점으로 많은 아시아계 조직들이 형성되었지만, 당시 연방 정부에서 성공적으로 주도한 일련의 공갈 기소는 이들 집단들을 효과적으로 해체시켰고 여러 중국계와 베트남계 갱단들을 방황하는 늑대 무리에 가까운 소규모 집단으로 전락시켰다. 존 길브라이드 DEA 뉴욕 사무국 특수 요원은 멕시코와 콜롬비아의 마약 카르텔을 가리켜 잘하는 게 한 가지뿐인 집단(One-Trick Pony)이라고 묘사하며 미국 내에서는 마약거래 지배권에만 집중하여 다른 수지맞는 범죄에는 가담하지 않는 약점이 있다고 했다.

2001년 9.11 테러는 FBI 내 조직범죄 부서가 대폭 축소되고 많은 인력이 대테러 부서 쪽으로 옮겨가게 만든 사건으로써, 미국 마피아 입장에서는 큰 호재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약 3년간 뉴욕 감비노 패밀리의 조직원으로 잠입수사를 했던 전 FBI 특수 요원 호아킨 가르시아(Joaquín García)가 2014년 인터뷰에서 말하길 "마피아들은 조용하고 원활한 사업을 원한다. 그들은 더 이상 야생의 서부가 아니라는 배움을 과거로부터 얻었다. 1950~1970년대와 달리 마피아는 이일을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들 하고만 일한다. 마피아는 약해지지 않았다. FBI가 라 코사 노스트라를 진압하는 데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지만 당시는 마피아들이 그들의 최우선 과제였다. 이제 테러다. 그들은 한 번에 너무 많은 핵심 목표에 집중할 인력이 부족하다. 그 결과 마피아의 세력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과거의 마피아들은 수사기관에서 항상 자신들을 미행한다는 걸 알았고, 본인이 실내에 있을 때면 수사관들이 밖의 차량에서 자신들을 기다리며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알았지만, 이제 FBI에서는 더 이상 그들을 미행하지 않고 마피아들도 그 사실을 잘 안다. 마피아는 지하로 들어갔고 이제 누구도 그들이 어디서 무얼 하는지 모른다."라고 꼬집었다.[42][43][44]

위의 서술대로 21세기의 미국 마피아는 자기네 조직의 원류인 시칠리아 비밀결사 시절의 저자세를 취한 채 더욱 지하로 파고들어갔다.[45] 현대에는 미국의 일반 시민이 마피아들이 개입하는 이권사업의 관련자이거나 음지에 손을 댔을 경우를 제외하면 과거에 비해 일상생활에서 이들의 존재를 느낄 일은 잘 없다.[46] 주요 미국 마피아 패밀리는 여전히 권력과 부를 유지하고 있으며, 비밀리에 두목을 선출한다. 이에 FBI는 조직 수뇌부의 변화 동향을 면밀히 주시하고 있다.[47]

미국의 라 코사 노스트라 마피아 조직 중 최고로 꼽히는 뉴욕 제노비스 패밀리의 경우 통상 오고 가는 불법 거래액만 연간 5억 달러를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48][49] 특히 제노비스 패밀리는 다른 미국 마피아 패밀리들과 비교했을 때 오메르타 계율을 깨고 정부 증인으로 돌아서는 조직원 숫자가 적어 (2019년 기준) 역사상 단 8명의 정규 조직원만 계율을 어긴 것으로 유명하다.[50] 특히 조직 내 두목급 간부의 변절은 타격이 큰데, 1990년대에 감비노 패밀리와 루케시 패밀리는 상술한 새미 그라바노[51]와 앤서니 카소[52]라는 부두목의 배신을, 1998년에 필라델피아 패밀리는 랄프 나탈레, 2004년에 보난노 패밀리는 조셉 마시노라는 두목의 배신을 겪은 데 비해 대조된다.

2011년 하워드 아바딘스키 세인트 존스 대학교수에 따르면 현대 미국 마피아는 부분적인 아웃소싱(기업 업무를 제3자에게 위탁해 처리하는 방식) 형태로 발달했으며, 수사기관의 관심을 분산시키기 위해 자신들의 일부 범죄 활동을 바이커 갱단으로 대표되는 다른 조직범죄 집단에 맡긴다고 한다.[53] 아바딘스키 교수에 의하면 아웃로 MC는 최근 몇 년간 시카고 아웃핏과 많은 일을 해왔고, 헬스 엔젤스 MC는 뉴욕의 마피아 패밀리들에 이용되고 있으며, 필라델피아 마피아는 파간스 MC라는 조직을 사용한다. 비록 마피아는 백인 위주로 구성된 바이커 갱단을 제일 선호하긴 하지만, 유색 인종 폭력배들과도 관계를 맺는다. 2013년 뉴욕 브롱스에서 벌어진 퍼플 갱 두목 살인사건에서는 흑인 폭력배를 암살자로 고용했고, 2019년 마피아 기소 내용을 보면 뉴욕 감비노 패밀리 행동대원 빈센트 피오레가 자신의 아들을 폭행한 사람들을 공격하기 위해 히스패닉 갱단 라틴 킹즈 조직원들을 보내겠다고 협박했다. 또한 마피아는 조직원이 수감되었을 때를 대비해 교도소 갱단 아리안 형제단과도 동맹을 맺었다.[54]

물론 FBI로 대표되는 수사기관들도 여전히 미국 마피아에 대한 감시를 하고 있으며 조직범죄 부서에 속한 수사관들은 매 순간 유죄를 입증할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열을 올린다. 2011년에는 FBI에서 마피아 조직원 100여 명을 구속해서 타격을 입혔다.[55] 기사 속 2011년도 작전은 기소 인원으로 봤을 때 FBI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마피아 작전이라고 평가받는다. 뉴욕의 5대 패밀리와 뉴저지 주의 데카발칸테 패밀리, 뉴잉글랜드 지방의 페트리아카 패밀리를 대상으로 진행된 수사의 결실로, 뉴욕 콜롬보 패밀리 대행 두목 앤드루 루소가 포함된 100여 명의 마피아와 관련자들을 체포하고 기소해 타격을 입혔지만, 역설적으로 뉴욕 항 주변은 물론이고 수많은 노동조합들이 여전히 마피아의 영향력 하에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당시 영화 대부에서 산티노 콜레오네를 연기했던 배우 제임스 칸이 앤드루 루소를 위해 탄원서를 제출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56]

요약하면 현대 미국 마피아는 금주법 시대에 쌓은 부와 영향력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전성시대를 거치고 1980~1990년대 범죄와의 전쟁을 겪으며 여러 고위 간부들이 투옥되고 약화되었으나[57] 여전히 미국 암흑가에서 가장 강한 세력이다.[58] 미국 내 마피아의 세력이 너무 강해서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이탈리아계 라 코사 노스트라 마피아가 자국 조직범죄계의 도전받지 않는 지배자라고 생각한다. 마피아와 애증 관계에 있는 할리우드 연예산업이 보통 대부, 좋은 친구들, 카지노, 소프라노스, 아이리시맨 등의 잘 알려진 작품들을 통해 마피아를 모든 범죄 사업 분야의 정점으로 묘사하고, 다른 범죄조직에 비해 호의적이고 낭만적으로 그려놓기에 그런 생각은 더 강화됐다. 엄청난 권력과 규모를 자랑하지만 라 코사 노스트라 마피아가 미국 범죄사에 유일한 선수였던 적은 없었다. 마피아가 미국에 진출하기 50년도 훨씬 전부터 미국은 늘 갱들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최근엔 동유럽 이민자, 러시아 정부의 토벌에 의해 국외로 향한 레드 마피아 세력들이 가세하고 있다. 미국의 이탈리아계 라 코사 노스트라 마피아 조직과 미국의 러시아계 오르가니자치야 레드 마피아 조직은 양측 다 고향 국가에 강력한 조직 기반을 두고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자랑하는 글로벌 범죄조직으로, 사업하는 데 있어 대결하고 반목하기보다는 서로 협력하는 입장에 있다.

2010년대 뉴욕 감비노 패밀리 두목 도메니코 체팔루와 부두목 프랭크 칼리를 보면, 체팔루는 시칠리아 출생의 이탈리아인이고 칼리는 미국인이지만 유명 시칠리아 마피아 가문의 여인과 혼인한 인물로, 둘 다 시칠리아와 깊은 유대를 가지고 있다. 이는 21세기 들어 미국 마피아 (특히 감비노 패밀리) 내에서 신규 조직원으로 미국인보다 시칠리아 출신 조직원들을 더 선호하는 추세가 조직 수뇌부 인사에도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2015년 뉴욕 감비노 패밀리의 한 관련자는 NBC 방송에 출연해 연방 정부를 향해 "테러 조직 IS에 대항할 때만큼은 같이 싸우자. 마피아는 세간으로부터 나쁜 평판을 받고 있지만 그중 상당 부분은 부당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친구들과 가족들이 극단주의자들과 테러리스트들, 특히 이슬람 국가라고 부르는 잔인하고 정신병적인 조직으로부터 보호받도록 해야 한다. 우리 마피아는 정부의 뛰어난 최신 기술로도 포착할 수 없는 개인의 움직임과 행동에 대한 정보, 즉 인간 정보(Human Intelligence)를 얻기 쉬운 위치에 있다."라고 얘기했다. 이 같은 제안은 파리 테러가 일어난 직후, 남부 이탈리아 경찰 당국이 "마피아가 이슬람 테러 음모와 싸우기 위한 정부의 핵심 동맹이 되었다."라는 사실을 인정한 후에 나온 것이다. 한 이탈리아 경찰관은 "IS가 마피아 두목들에게 끌려갈 것을 우려해 시칠리아, 칼라브리아, 풀리아, 나폴리 등지에 진입하는 것을 너무 두려워하고 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2019년 3월 14일 뉴욕 감비노 패밀리의 대행 두목(Acting Boss)을 맡고 있던 조직의 부두목 프랭크 칼리가 암살당했다.#[59]

34년 만의 뉴욕 마피아 두목급 간부의 피살사건에 전미가 뉴스속보로 다루고 있는 중에 범인이 검거된 후 초기에는 마피아 조직의 파벌다툼이라고 생각했던것이 알고보니 사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살인사건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물론 공식적인 동기는 아직 베일에 싸여있다. 마피아 사업과 연관 없다는것 정도가 정설.

경찰이 검거한 용의자 앤서니 코멜로(24)라는 평범한 청년이 미국 전역에서 가장 악명높은 마피아 중 한 명을 살해한것에 많은이들을 충격에 빠트렸다.[60][61][62] 일단 CCTV에 찍힌 사건 전말은 이렇다. 코멜로는 자신의 픽업트럭을 몰고 뉴욕 스태튼 아일랜드의 토트 힐(Todt Hill)에 위치한 프랭크 칼리의 자택 앞까지 가서[63] 칼리의 은색 캐딜락 에스컬레이드를 들이받았다. 그 후 칼리가 나오자 몇분간 대화를 이어갔고 악수까지 나눈 뒤 집으로 들어가려는 마피아 부두목의 등 뒤에다 총을 난사한 것[64][65] 지문도 검출되고 범행에 이용된 차량도 발견되는 등 허술한 뒷처리끝에 붙잡힌 코멜로는 기자들이 방청한 범죄인 인도 심리에서 손바닥에 도널드 트럼프의 선거구호인 MAGA Forever[66]를 볼펜으로 적어 방청석에 보여주는 등 기행을 일삼았다.[67] 코멜로의 변호인 로버트 고틀리브는 자신의 고객이 범죄인 인도를 거부했으나 다음주에 뉴저지 주에서 인도된 뉴욕 주의 공판정에 출석해 재판을 받을 예정이며, 매우 ‘심각한 위협’을 받은 뒤 보호수용 되어있고 현재 마피아 암살자(Mafia hitman)들이 복수를 위해 군침을 흘리고 있는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68][69]

2019년 3월 19일 프랭크 칼리의 장례식이 열렸다. 묫자리의 가격이 4만 5천 달러(약 5100만원)라고 미국에서 기사화가 되었다. 장례식을 취재하던 한 기자는 조문객으로부터 머리를 뜯어버린다는 협박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코멜로의 보석 심리에서 총격 이후 코멜로가 '나는 도주 중이다. 우리 가족은 이제 (마피아의) 표적이 되었다. (I'm on the run, my family is marked)' 라는 문자 메시지를 지인에게 보냈던 것으로 알려졌다.#

2019년 4월 3일 코멜로가 기소되었다. 정확한 범행동기는 여전히 밝혀지지않았고, 당국은 코멜로가 어느 교정시설에 구속되어있는지도 밝히지 않았다. 변호인은 다시 한 번 피고인의 안전 보장을 강조했다.#

프랭크 칼리 사망 이후, 미 사법당국은 프랭크 칼리의 빈자리를 로렌조 만니노가 대체했다고 보고 있다.[70]

2019년 7월 21일 사건 발생 초기에 몇몇 언론 보도로 피고인이 프랭크 칼리의 조카와 연애를 하려 했지만 53세의 마피아 부두목이 허락하지 않아서 살해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었는데 재판 과정에서 코멜로의 진짜 범행 동기가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변호인에 의하면 피고인 앤서니 코멜로는 미국 웹상에서 떠돌고 있는 우파 음모론에 심취해있었고[71] 범행 자체도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를 돕기 위한 의도였다고 한다.[72] 이 음모론에 따르면 미국 정부를 배후조종하는 범죄자들로 구성된 도당인 Deep State라는 게 있는데[73] 피고인은 프랭크 칼리가 미국 최대 범죄조직 중 하나인 감비노 패밀리의 두목이라고 확신했고[74] 나아가 프랭크 칼리를 Deep State의 핵심 구성원으로 여겼다고 한다. 피고인은 Deep State의 구성원을 대상으로 하는 시민에 의한 체포(Citizen's Arrest)를 추구했고 프랭크 칼리를 체포한 후 군대에 신변을 넘기려고 했다. 즉, 최초에는 칼리를 살해할 의도가 아니라 체포할 의도였다고 주장한다. 피고인이 수갑을 지참하고 칼리의 집을 찾아갔지만, 막상 칼리와 대면하자 그가 체포를 거부하고 총을 꺼내는 듯한 동작으로 자신의 허리춤에 손을 뻗자 공포를 느낀 피고인이 우발적으로 총을 꺼내 살해했다는 것이 변호인의 변론이다.[75] 그리고 프랭크 칼리 사건 두 달 전인 2019년 1월에는 피고인이 또 하나의 Deep State 관계자라고 생각한 미국 민주당 소속의 뉴욕 시장 빌 드 블라시오(Bill de Blasio)를 목표로 2번 체포를 시도했지만 경찰에 막혀 접근에 실패했다고 한다.[76] 정치인의 암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범죄자를 암살하는 내용의 영화 택시 드라이버의 현실판이 아닌가 생각나는 이야기다.[77]

2019년 7월에는 FBI와 이탈리아 경찰의 약 1년에 걸친 공조 수사로 시칠리아 마피아의 인제릴로 파벌과 뉴욕 감비노 패밀리 조직원 19명을 체포했다. 한 마피아 전문가는 시칠리아와 뉴욕의 범죄조직 지도부가 대서양 양안 마피아 조직의 세를 규합하고 있으며, 양국의 마피아 조직이 여전히 강력한 유대를 갖고 사업을 지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지적했다. BBC에서는 양측 조직원들이 사망한 감비노 패밀리 부두목 프랭크 칼리가 생전에 소유했던 부동산의 판매를 논의하기도 했으며, 시칠리아에서의 이번 작전은 감비노 패밀리의 근거지인 뉴욕 브루클린 18번가에도 타격을 입힐 수 있다고 전했다.[78]
4. '정통' 마피아의 조직양상
'마피아'라는 용어 자체가 범죄조직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렸기에 요즘에는 으레 '차이니즈 마피아', '러시안 마피아' 같은 식으로 차용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 '마피아'의 원조에 해당되는 이탈리아 마피아는 그 자체로 하나의 뚜렷한 특징을 지니고 있는 고유한 범죄적 조직유형으로, 그 뒤에는 고유의 시대적 조건 및 역사적 배경이 존재한다.

오늘날 마피아 연구자들은 이탈리아식 '마피아' 유형의 조직 범죄의 가장 중요한 요소들로 1. 이탈리아-시칠리아식 가부장적 가족문화, 2. 파트론-클라이언트 관계, 3. 미약한 중앙권력과 민주주의, 4. 자본주의의 네 가지 정도를 꼽는다. 이 요소들이 특이하게 결합된 형태가 마피아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 네 가지 요소들이 갖춰지지 않거나 부족한 결격 사유가 생기는 경우 그에 기반한 마피아식 조직유형은 쇠퇴할 수 밖에 없다는 것.
4.1. 이탈리아-시칠리아식 가부장적 대가족문화
일반적으로 연구자들은 마피아의 기원을 19세기 중후반에서 20세기 초반, 시칠리아로 꼽고 있다. 당시 시칠리아는 여느 유럽국가와 마찬가지로 급속한 자본주의화를 겪고 있었으며, 고도의 산업화가 이미 진행되고 있던 영국, 프랑스, 독일과는 달리, 산업화가 미약하여 산업-금융자본의 형성 보다는 우선 농지의 집적을 통한 농업자본의 형성이 이루어지는 아일랜드와 비슷한 상황이었으며, 이는 그러한 자본주의화 모델에서 흔히 발생하는 것처럼 대지주들과 소작민, 자영농 사이의 격한 대립이 상존하였다.

이 과정에서 대지주들은 토지를 수취하려는 목적으로 대지주들은 자영농들에게 회유와 협박을 일삼았는데, 이에 대해 시칠리아의 자영농들이 가족단위로 뭉쳐 대지주들에게 대항을 했다. 이탈리아의 공적인 행정 및 치안권력이 미약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79] 사실상 왕초노릇을 하던 대지주들이 땅을 빼았을 목적으로 자영농에게 폭력과 살인을 벌였고, 가족 단위의 자영농들은 그에 맞서 그 이상의 폭력과 살인으로 되갚음을 해주는 복수극이 끝없이 되풀이되었으니, 이것이 곧 그 유명한 "벤데타(vendetta)"이다.

이탈리아-시칠리아는 매우 강한 대가족 문화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대지주들 역시 그 자신의 가문 단위로 활동을 했고, 그에 맞서는 자영농들 또한 가문 단위로 뭉쳤으며, 대지주들 가문 사이의 동맹이 자영농들 사이의 동맹을 상대로 싸우고 있었으며, 그러한 대립은 사회적으로는 '지주 vs. 자영농' 관계였으며 동시에 사적으로는 '우리 가문 vs. 쟤네 가문' 의 양상을 띄게 되었으니, 가문의 이해관계와 명예를 위하여 당한 폭력은 반드시 더한 폭력으로 앙갚음을 하는 '가문 단위의 복수극'이 빈번하게 발생했던 것.

이후 미국 땅에서 조직범죄화 한 후에는 확장경향으로 인해 가족이나 친척이 아닌 조직원들도 받아들이게 되었으나, 그 경우에도 기본적으로는 뭔가 매우 중요한 공통된 연고가 있었다. 특히 미국에서는 출신동네를 통한 연고관계라든지, 그것이 아니라면 최소한 "누군가 아는 사람을 통해 소개"를 받는 등, 반드시 인연과 연고의 관계를 취한다. 애초에 특정 마피아 조직을 "~~패밀리"라고 하는 것 부터가 기본 조직모델이 가부장적 확장가족의 형태를 모사한 것이다.
4.1.1. 다른 이론들
위 항목에서도 나오듯, 시칠리 마피아의 출현과 성장 배경을 두고 당시의 치안 공백, 그리고 신변보호를 원하는 주민들의 요구가 주된 요인인 것으로 분석하던 2003년 연구가 있었으며 이는 그 구조적인 특성상 꽤나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2010년 이후에 나온 최근 연구의 경우 이에 대해 이견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19세기 들어 오렌지와 레몬의 수요가 급증했는데, 시칠리는 해당 품종들에게 있어 최적의 재배지였고 이 덕분에 폭력조직이 착취할 자본 역시 증가하여 마피아로 성장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관련 논문
사회주의 탄압을 위해 폭력조직 동원이 이루어졌으며, 이것이 마피아로 성장했다는 것. 관련 논문
4.2. 파트론-클라이언트 관계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에서 줄곧 등장하는 내용 중 하나가 고대 로마의 "파트로누스(patronus)-클리엔테스(clientes)" 관계에 대한 것인데, 여기서 마피아의 한 요소로 언급되는 '파트론(후원자)-클라이언트(피후원자)'관계와 완전히 동일하다. 로마시대로부터 내려온 것이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 이래로 주욱 내려오는 이탈리아 지역 특유의 사회관계 중 하나로, 로마의 멸망 후 오랜 시간 동안 통일국가 없이 도시국가 단위로 쪼개져 지내오면서 이탈리아 지역의 사람들은 근대 이탈리아가 수립되기 전까지는 어떤 통합적이고 중앙집권적인 행정권력에 귀속된 경험이 전혀 없다. 따라서 모든 인간관계는 도시, 마을, 영지 단위에서의 유력자들과 그 영향력 아래에 있던 귀속인들 사이의 것이었으며, 이러한 소단위 내에서는 명확한 성문법과 강력한 행정권력이 공적인 권력으로 발휘된 것이 아니라, 관습법과 풍습, 후견인의 취향과 변덕, 그리고 서로 간의 유대와 호의, 배려와 같은 사적인 형태를 띄었다.

즉, 공식적으로 법률이나 원칙이 뭐라고 떠들던간에 그 법은 멀고 희미한데 주먹은 또렷하고 가까우니, 기왕이면 그 '주먹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모든 일을 딱딱하게 하기 보다는,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주먹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대신, 내가 필요한 경우에는 주먹에게 청탁하는 식의 사적 인맥과 충성관계가 로마의 파트로누스-클리엔테스 관계이자 마피아의 파트론-클라이언트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로마는 법의 민족'이니 뭐니 하면서 마치 고대 로마가 오늘날 근대국가 수준의 공적이고 객관적인 통치를 행했다며 환상을 품은 사람들이 많은데 시오노 할매처럼, 실상은 유명한 미드 "ROME" 시리즈에서 묘사된 것이 사실은 고대국가 로마의 현실이자 한계에 보다 근접한 것이다.

미드 "ROME" 시리즈에서 충성스럽고 근면한 군인인 루키우스 보레누스가 퇴역한 후 로마로 들어와서 겪게 되는 일을 보면, 순진한(?) 보레누스의 생각과는 달리 어떤 대단히 민주적이고 객관적인 방식으로 공적 권위를 얻는게 아니라 마치 전국구 조폭 똘마니가 나와바리 배정받고 두목의 후견 아래 급격히 권력이 불어나는 모습을 방불케 하는데 이게 공화정 후기-제정 초기까지의 로마 귀족사회의 모습이다.

현대사회처럼 법의 권위가 강력한 구속력을 발휘하고 있는 환경이라면 기득권을 쥐고 있는 대귀족들이 작당하여 개혁을 외치는 그라쿠스 형제를 대놓고 살해하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즉, 실질적으로 로마 사회는 가부장을 대표로 하는 강력한 가문단위 세력들 사이의 합의제 사회였으며, 이 가문의 수장들이 지닌 막대한 권력은 일족의 권위에 귀속되어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생사여탈을 관장할 수준이었으며, 그러한 대가문의 수장들이 세력을 키우고 자기 사람들을 관리하는 것은 성문법적 원칙에 따른 것이 아니라 관습법을 가장한 가부장의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

이렇게 보면 로마의 대가문의 수장과 그 휘하 세력은 딱 조폭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는데, 그게 맞는 말이라는게 흠좀무다. 고대 로마의 그 조폭-똘마니-나와바리 등 요소들이 2,000년 시대를 이동하여 현대로 들어온게 마피아 조직이론 그 자체라는 것. 마피아의 활동원칙은 이와 완전히 동일하다.

마피아는 자신의 하수인, 자기 영향력 아래의 주민들과 기본적으로 1:1의 후견인-하수인 관계를 맺으며, 그 하수인들 사이는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마피아가 장악한 지역에서 밀주업자 A와 경찰 B가 있다면, 마피아는 A, B와 각각 별개의 후견인-하수인 관계를 맺으며, 밀주를 만드는 A가 경찰인 B 때문에 피해를 입어야 하는 상황이 오면 A의 탄원을 받아 B의 행동을 제약하게 만들고, 이로 인해 업무를 제대로 못하는 B가 곤란해하니 A가 밀주로 얻는 수입의 일부를 B에게 양도하여 B에게 '보상'을 해준다. 이로 인해 B의 상관인 경찰서장 B'가 B를 곤란하게 만들면 B' 또한 회유하거나, 그게 안되면 B'를 사라지게 만든다.

이런 식의 일들이 벌어지면 마피아가 장악한 지역에서 일부 사람들은 마피아에 대해 "공권력은 아무 것도 못하지만 저 패밀리는 이런 식으로 지역 내 분쟁을 해결해주는 훌륭한 사람들이다"라는 식의 착각을 하게 되면서 유착은 가속화된다. 그러나 실상은 마피아야말로 애초에 모든 문제의 흑막이자, 이런 식의 사적인 후견인-하수인 유착관계에서 법과 원칙 따위는 이미 안드로메다로 날아간지가 오래다.

즉, 이런 후견인-하수인 모델 아래 상호유착 및 의존관계를 형성한 지역장악형 조직모델이 '진짜 마피아'라고 할 수 있다.
4.3. 미약한 중앙권력과 부패한 민주주의
위의 조건1과 조건2에서 언급된 내용을 보면 누구나 느낄 수 있지만, 범죄조직이 활동 근거지 내에서 거의 모든 주요 대상에 대해 문어발과 같은 유착관계를 형성한다. 그리고, 이러한 유착관계의 정점을 찍는 것은 중앙집중적 체계보다는 지방분권적 체계 아래에 있는 지역들의 정치인들과의 유착이었다.

실제로 이탈리아계 마피아가 융성했던 이탈리아-시칠리아 본토나 미국의 경우, 시대적 상황에 의해 모두 지방분권적 색채가 강한 곳들이다. 원조 마피아가 발생한 이탈리아의 경우 애초에 고대 이래로 거의 1,500년 동안 통일국가 없이 사람들이 살아온 지역이고 신생 이탈리아 정부의 행정권력이 미약한 곳이었으며, 심지어는 제2차 세계 대전까지도 이탈리아군의 국가단위 귀속의식이 희박하다는 말이 나온다. 아니, 오늘날까지도 이탈리아의 국가적 통합은 약한 편이어서 남부와 북부 갈등이 잘 해소되지 않는다는 말도 있다.

미국은 애초에 땅덩이부터가 20세기 초반의 기술 및 행정능력으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넓은 곳이라 각 주정부에 이양된 권한이 상당하며 (법률마저 주 마다 다를 정도), 오늘날에도 한 주에 완벽한 행정력을 투사하기가 힘들어서 동네에서 보안관 뽑아서 경찰노릇하도록 맡길 정도.

즉, 상대적으로 중앙통제가 미약한 곳에 자리 잡은 마피아는 각계에 후견인-하수인 관계를 통해 유착한 결과, 해당 지방 단위의 선거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즉, 마피아는 해당 지역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정치인을 후견인으로 두고 스스로 하수인이 되는 형태로, 지역적 유착으로는 해결되기 힘든 수준의 곤란이나 트러블이 발생했을 때(예컨대, 연방정부가 개입한다든지...) 그 해결을 '후견인'에게 부탁하는 대신, 선거마다 몰표를 거둬들이는 일을 하게 된 것. 이 과정을 수행하는 단체가 유니언(union)인데, 갱스터 영화에서 노조라고 번역되는 경우가 많고 상당 부분 겹치기는 하지만 유니언=노조는 아니다.

즉, 마피아라는 조직범죄형태가 20세기 초중반에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일방적으로 임명되는 총독이나 지방관과는 달리 민주주의가 도입되면서 일정한 간격으로 예측가능한 형태로 선거가 이루어진다는 점에 있었다. 민주주의의 선거제도가 부패하고 타락하여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오히려 최고의 이용물이 될 수 있었던 것. 한국에서도 혼란한 정국에서 정치깡패들이 선거에 개입하고 조작하려는 등 행패가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4.4. 자본주의와 국제금융
현대사회에서 범죄조직이 과거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막강해지는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로 이것은 비단 마피아에만 해당되는 사항은 아니다.

오늘날과 같은 자본거래가 이루어지지 않던 시절에 법치를 벗어나있는 범죄조직이 기껏해야 얻을 수 있는 이익은 기본적으로 현물거래로 감당할 수 있는 물량에 수렴한다. 중앙권력에서 벗어난 거대한 범죄단체가 있다고 할지라도 이들이 모은 자산은 현물이든, 증서나 신용장의 형태든 결국에는 한정되어 있으며 쉽게 추적이 가능하다.

반면, 신용경제의 등장은 '자본세탁'이라는 범죄조직의 신기원을 세상에 등장시켰다. 앞선 조건들이 '정통' 마피아들에게 시대적 한정을 붙여놓은 제약이기도 하다면, 자본주의의 국제금융시스템을 통한 자본세탁 및 이윤증식은 앞선 조건들을 모두 뒤엎어 놓는다 할지라도 여전히 조직범죄가 살아남아 성공적으로 국제화 및 기업화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 셈.

 


4.5. 오늘날의 '정통' 마피아
앞선 조건들 중 마지막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시대적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정통' 이탈리아 마피아의 표면적 쇠락에 영향을 미쳤다. 가부장제적 가족주의 조직형태가 오늘날 거대화한 기업형 범죄에 걸맞지 않는다는 것은 굳이 자세히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중소규모 가족경영의 기업이 결국 언젠가는 전문경영인과 전문적 이사회를 필요로 하게 되는 것과 같으며, 그러한 가족제적 경영의 끝판왕 취급을 받고 있는 한국식 재벌시스템도 오늘날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두 번째로 지적 된 파트론-클라이언트 관계 또한 이탈리아의 지역적특색이 너무 강한 감이 있으며, 특히 세 번째로 지적 된 조건과 합쳐서, 잘 해봐야 과도기적 근대사회에서나 통할 수 있는 조직요소로 평가를 받는다. 즉, 오늘날처럼 막강한 행정력과 '제민지배'를 현실화한 현대국가로 이행하기 이전, 근대국가의 수립이 이루어지던 시절 중앙행정력이 모든 시민에게 미치지 못했던 시절에나 특정 연고지에서 '왕초' 노릇을 할 수 있었던 지방적 조직범죄가 성행할 수 있었다.

결국 최신기술로 무장한 현대국가의 등장, 막강한 경찰력 및 치안관리능력, 그리고 그에 걸맞춘 건전한 시민사회의 등장은 과거와 같은 단순한 유착관계를 형성하기에 어렵게 만들며, 애초에 너무나 조직이 세분화되고 고도화 되어 과거처럼 몇몇 유지나 행정관, 경찰을 매수하는 정도로는 도저히 장악력을 유지할 수 없다.

결국, 오늘날에는 기업화, 국제화의 추세를 받아들인 마피아만이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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